역사는 반복된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인생의 풍부한 경험을 가진 지혜자에게 들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를 통해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또 다시 찾아온 기근. 약속의 땅에 다시 극심한 기근이 찾아 왔다. 가나안 땅은 하늘의 순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넉넉한 곡간을 약속하지만 그 뜻을 거스르는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문이 닫히는 땅이다.
• 애굽으로 내려가려는 이삭(창 26:1-6)
아브라함이 경험한 첫 흉년(B.C. 2090년경)은 이삭의 때에 발생하였던(B.C. 1990년경) 것보다 약100년전에 일어났다(12:10). 이삭은 그의 부친처럼 기근에 대응했다(12,20장). 애굽으로 내려갈 하였던 것이다. 그가 남쪽으로 여행할 때 여호와께서 그랄에서 그에게 나타나사 애굽으로 가지 말라고 경고하셨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이 애굽으로 갈 것을 예언하셨고(15:13), 이는 후에 요셉을 통하여 성취되었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이삭이 애굽으로 내려감을 금지하고 있다. 이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에굽의 팽배한 우상숭배로 인해 이삭의 신앙이 동요됨을 예견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언제나 선민에게 있어서 애굽을 죄악과 타락의 도성이자 신앙 연단의 장소로 이해시키고 있다(사 31:1; 렘 42:19; 겔 23:3).
그랄은 애굽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일종의 휴게소였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그랄에서 잠시 머물라고 말씀하셨으나, 20) 이삭은 그곳에 거주하고 말았다. 하나님은 또한 그에게 아브라함에게 하신 무조건적인 언약을 재확인해주셨다.
"이 땅에 유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 내가 이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내가 네 아비 아브라함에게 맹세한 것을 이루리다."(창 26:3).
3절의 ‘거하다(גּוּר)’는 단어는 원문에서는 6절의 'ישׁב'동사와는 다른 동사로서 잠시 머무는 정착을 가리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하나님의 동행과 임재를 약속하신 말이다. 선민 이스라엘과 항상 함께 하신 하나님은 후에 성막과 성전의 지성소에 거하셨으나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 약속은 완전히 성취되었다(요 1:14). 예수의 이름인 임마누엘, 즉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란 말은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마 1:23).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이미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 (22:16-18)을 재확인시켜 주신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한 자이며 그 핵심은 자손과 땅에 대한 축복이다. 이후 이러한 약속은 야곱에게도 주어졌으며(28:15) 부분적, 일시적으로나마 이스라엘 역사속에서 성취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이것은 영적 축복으로, 그 궁극적 성취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어 질 것이란 점이다. 오늘날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이제 이러한 축복을 온전히 누리는 자들이라 하겠는데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칭함 받고 있다는점(롬 8:15,16), (2) 성령이 그들 가운데 내주(內主)하신다는 점(갈 2:20), (3) 영원한 생명과 천국을 보장받고 있다는 점(요 3:16; 5:3,10) 등이다.
• 이삭의 두려움과 거짓말(26:7-17)
이삭은 그의 부친처럼 두려워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그랄 사람들에게 그의 아내를 누이로 잘못 소개했다.
'누이(아호트, אחות)'는 문자적으로 인척 관계인 '자매'를 뜻하나 은유적으론 매우 친근하거나 유사한 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한편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복 형제였던 것처럼 이삭과 리브가가 오촌지간이었다는 점에 근거할 때에(24:15)본절에서 이삭이 리브가를 가리켜 '누이'라고 말한 것은 일면 타당성이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1)사람을 기만하려 든 거짓말이며, (2)하나님께서 맺어 주신 부부 사이를 부정한 것이란 점에서 지탄을 면할수 없다. 게다가 이 같은 잘못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범했던 것과 동일한 잘못이란 점에서(12:10; 20; 20:1-18) 우리는 부모의 그릇된 언행이 자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분명히 교훈받을 수 있다(엡 6:4).
아버지의 연약이 아들에게서 반복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속임수가 드러나고 책망을 받자 이삭은 자백을 했다. 자백은 축복을 가져온다. 이삭은 그랄에서 부요해졌는데, 너무 부요해지자 당시의 통치자인 아비멜렉이 그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이삭은 그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랄 골짜기로 옮겼다.
• 우물을 파는 인생(창26:18-25)
블레셋인들이 아브라함이 판 우물을 일찍이 메워버렸는데, 그것은 새로운 입주자들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뜻의 적대적인 행위였다. 이삭은 그 우물들을 다시 팠다. 에섹(다툼, עשׂק)과 싯나(대적함, שׂטנה)에서 블레셋인들과 분쟁이 일어났다.
마침내 이삭은 블레셋인들을 떠나갔다. 이번에는 우물을 팠는데도 다툼이 없었으므로 그곳을 르호봇(רחבת, 장소가 넓음)이라 이름지었다. 거기서 그는 브엘세바로 갔는데, 여호와께서 그곳에서 축복된 약속으로 이삭에게 확신을 주셨다. 이삭은 거기서 단을 쌓고(예배), 장막을 치고(거함), 그리고 우물을 팠다(새롭게 됨).
"이삭이 그곳에 단을 쌓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거기 장막을 쳤더니 그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창 26:25)
이삭의 생애는 우물을 파고, 빼앗기고, 또 이주하여 파고, 빼앗기고, 또 새롭게 우물을 파는 삶의 연속이었음을 알게 된다. 물이 물질적인 영역에서 필수적인 요소이듯이 말씀의 물은 영적인 영역에서 그러하다.
"오직 의인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밤낮 묵상하는 자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과실을 맺고 그 잎이 마르지 않는 것처럼 하는 일마다 다 잘 될 것이다.(시편 1:2-3)
•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다(창 26:26-33)
"이때 그랄에서 아비멜렉이 그의 고문 아훗삿과 군사령관 비골과 함께 이삭을 찾아왔다. 이삭이 그들에게 “당신들은 나를 미워하여 쫓아내고서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소?” 하고 묻자 그들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여호와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는 것을 분명히 보았소. 그래서 우리가 당신과 계약을 맺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소. 이제 당신과 우리 사이에 계약을 맺읍시다."(창세기 26:26-28)
26절부터 31절에 대해서 윌리암스는 이렇게 해설한다. “이삭이 그랄 사람들과 분명히 자신을 분리했을 때 그랄 사람들이 그를 찾아와 하나님의 축복을 구했다.…그리스도인이 세상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때는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삶을 살 때이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요한일서 2:15)
이삭이 아비멜렉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그날 이삭의 종들이 우물을 얻었다. 아브라함이 당시의 아비멜렉과 거기서 언약을 체결한 까닭에 일찍이 그곳 이름을 브엘세바라 이름지은바 있었다(21:31).
이제, 비슷한 상황에서, 이삭이 그 이름을 다시 세바 혹은 브엘세바라 불렀다.
• 에서가 이방여인을 아내로 맞다(창26:34-35)
"에서는 40세에 헷족의 두 여자와 결혼했는데 그들은 브에리의 딸 유딧과 엘론의 딸 바스맛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다."(창세기 26:34-35)
에서가 유딧과 바스맛이란 두 이방 여인과 결혼한 것이 부모에게 근심을 끼쳤는데, 이 후로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과 멍에를 같이 해왔다. 이 일은 에서가 장자권을 얻기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더욱 드러내었다.
여러분은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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