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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아브라함의 애굽 이동 및 귀환(12:10-13:4)

by 😘 소소한행복^^ 2020. 5.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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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창세기 12:10)

가나안(팔레스틴) 지방은 지리적 여건상 우기와 건기가 뚜렷이 구분되어 대개 양력 10, 11월에 집중적인 비가 내린다. 따라서 이대 비가 적게 오면 그 다음 해에는 기근이 들게 마련인데 가나안으로 이주한 아브람에게 때맞춰 닥친 이러한 기근은 다시금 그의 신앙과 인내를 시험 하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아브라함은 그 땅(약속의 땅)에 남아 고통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던지 먹을 것을 위해 그 땅을 떠나든지 선택을 하여야 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 눈을 돌렸다. 애굽은 나일강이란 풍부한 수원(水原)으로 인해 어지간한 가뭄에도 불구하고 거의 기근을 모르는 지역이다. 따라서 아브람이 기근을 당하여 메소포타미아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지혜로운 행동으로 평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애굽은 성경에서 세속을 상징하는 나라나 혹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적 도움, 수단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볼 때 (사 31:1) 그가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경솔한 처사이자 실족을 자초하는 전조 행위였다 하겠다.


• 잘못된 선택
기근이 심해지자 아브람은 하나님이 택해주신 곳을 떠나 세상을 상징하는 애굽으로 피신했다. 이러한 이동이 문제를 일으켰다. 아브람은 그의 아름다운 아내 사래를 취하기 위해 바로가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래서 아브람은 사래를 설득시켜 그녀가 그의 누이라고 거짓말하게 했다. 아브라함의 이러한 태도는 아내 사래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 부득불 취한 신중하고도 불가피한 처사라고 합리화시킨다. 그리고 사래가 아브람의 이복 누이였던 점(20:12) 만을 생각하면 아브람의 이러한 행위는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과 현시를 받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 하지 않고 인간적인 처세 방법을 택했다는 것은 엄연한 잘못이자 나아가 남을 속이려는 기만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그 동기가 속임수이기에 여전히 거짓말이었다.

시대를 막론하고 이방인이 타지에서 경원시 당하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다. 더군다나 당시 애굽 사료들에 의하면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살인쯤은 예사로이 자행하던 시대상을 엿볼수 있다. 따라서 아브람은 애굽인들이 자신을 죽이고 사래를 빼앗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지금 까지 자신을 인도하며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여전히 믿었더라면 이러한 부질 없는 염려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계략(사라를 누이가 속이)은 아브람에게는 이로운 것이었으나(그는 상당한 보상을 받았다), 사래에게는 해로운 것이었다(그녀는 바로의 후궁에 속해야 했다). 또한 그 계략은 바로에게도 해로운 것이었다(그와 그의 가족이 재앙을 겪었다). 바로는 그 속임수를 알게 되자 아브람보다 의롭게 행동했다. 그는 아브람을 꾸짖은 뒤에 그를 가나안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은 육신적인 무기로 영적인 전쟁을 치러서는 안 된다는 것과,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죄를 범하고 아무 일 없이 빠져 나올 수는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버리지는 않으셨으나 죄가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허락하셨다. 아브람은 바로에 의해 공적으로 낮추임을 당했으며 불명예스럽게 추방을 당했다.


한편, ‘바로’란 명칭은 고유한 이름이 아니라 왕이나 황제, 대통령 등과 같은 칭호이다.


• 애굽에 대한 환상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


애굽은 육신의 눈으로 볼 때 굉장히 매력적인 땅이다. 니므롯이 추구하던 제국의 전형적인 모습을 갖춘 곳이다. 인간문명이 만개한 곳이며, 풍성한바벨탑은 무너졌지만, 그가 세우려던 바벨론(세속 제국)은 계속해서 인류 역사속에 세워지고 유지되었다. 바벨론은 온갖 화려한 것들로 치장하고 자신의 매력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욕망을 부추기며 혼미케 하여 진리에 대해 무지하게 만들고 자신과 더불어 영적으로 혼음케하여 영혼을 더럽게 한다.

그래서 계시록은 바벨론은 계시록에서 "모든 나라와 더불어 음행하는 음녀(창녀)"로 묘사한다(계 14:8).

바벨론은 또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이고,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라고 규정한다(계 18:2).

땅의 왕들은 그녀와 함께 음행할뿐 아니라, 상인들도 그의 세력을 인해 치부하게 하였다(18:3). 이러한 바벧론의 행위는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하나님께서 잊지 않고 그에 따른 응분의 진노를 부으신다.

애굽의 저변에 흐르는 바벨론의 강물(정신)이었다. 약속의 땅에 거하는 것은 보장된 물질의 축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난의 길을 걷는 여정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좁은 길이 생명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며 하나님의 보호의 막대기와 은총의 지팡이가 함께 하는 길이니 결코 불행한 길은 아니다. 맛본 자만이 알 수 있는 축복의 길이다.


• 다시 돌아온 아브라함(13:1-4)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13:3-4)

아브람이 애굽에서 벧엘로 돌아온 것은 그가 하나님과의 사귐에로 돌아온 것을 의미했다. “벧엘로 돌아오라”는 호소는 주님을 떠나 방황하는 모든 이들을 향한 것이다.

아브람이 자기 가족과 소유를 이끌고 애굽에서 나온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의 예표로 볼 수 있다.(1)기근으로 인해 애굽에 내려간 점(42-47장)(2)애굽에서 어려움을 겪은 점(출 1장)(3)하나님의 돌보시는 역사와 재앙에 의해 구출된 점(출7장-12:30)(4)풍부한 소유물을 이끌고 출애굽한 점(출 12:31-38).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언약의 땅 가나안을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려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된 우리들에게 언약의 땅을 천국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까지 내주셨다(골 1:20).

"그리고 하나님은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의 피로 평화의 길을 열어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모든 것을 그분을 통해 자기와 화해하게 하셨습니다."(골로새서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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