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

[사하라의 별빛 아래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그 이유가 어떠하든 힘든 길이다. 특히 광야를 지나야 한다면 그 여정은 더욱 힘들 수밖에 없다. 도시가 더 고향 같고 빌딩숲이 더 친근하고 편안한 사람들에게 광야는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전쟁터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차드는 아프리카의 내륙국가로 사하라사막을 머리에 이고 있다. 매년 10킬로미터씩 성장하는 사하라는 지금도 성장판이 열려있는 사막이다. 지구온난화로 메말라가는 차드호수가 날려보내는 먼지는 멀리 카리브해까지 날아가 차드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의 호흡기질환을 일으키고 있다. 사하라의 힘은 이처럼 대단하다. 사하라 주변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 영향력은 또 얼마가 크겠는가?

이곳 차드에서 살기 위해 울고, 또 사역하기 위해 아파했던 시간이 십 년을 넘어섰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차드의 강산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아니 더욱 황량해지고 더 척박해진 것 같다. 선교사 이전에 아빠로서 남편으로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더위, 먼지, 말라리아, 높은 물가, 내전, 외로움 등이 척박한 땅에서 지켜내기 위해 달려온 세월을 몇 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차드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 방치된 아이들이 내 눈에 들어와선 떠나지 않고 계속 밟혔다. 그들을 위해 유치원을 세우고 옆에 조그만 보금자릴 지었다. 차드의 수도 은자메나(N’Djamena) 남쪽의 한 귀퉁이였다. 그런데 그곳엔 물도 전기도 전혀 들어오지 않아 오지와 같았다. 두레박우물을 파야만 했다. 많이 불편했지만 그런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건기가 시작되자 우물이 곧 말라버렸다. 물 동냥을 이곳 저곳으로 다녀야 했다. 처음엔 환영하던 사람들도 나중엔 싫어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빚을 내어 새로 깊이 우물을 파고 수중펌프를 설치했다. 꿈만 같았다. 집안에서 수도꼭지를 틀자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이번엔 발전기가 고장이 났다. 이미 여러 차례 고쳤던 발전기는 더 이상 고칠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전기는 없어도 살 수 있지만 물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정말 그땐 차드를 떠나고 싶었다. 당장 물을 올릴 발전기를 구입할 돈이 없어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조각가인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뜻밖에 작품을 하나 하게 되었고 생각지 않은 돈이 들어왔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 돈은 자기를 위한 돈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돈일 것 같아 보내겠다는 것이다. 정확히 발전기를 구입할 수 있는 돈이었다.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날들을 불편과 씨름해야 했고 궁색함과 동거해야만 했다. 그러나 가장 힘든 것은 생활의 불편함이나 궁색함이 아니다. 외로움과 영적인 메마름이었다. 건기 때 차드의 대지는 온통 잿빛이다. 사하라의 뜨거운 바람이 모든 것을 메마르게 하기 때문이다. 초록을 잃어버린 대지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악귀와 같다. 이 땅의 황량함은 그 땅에 딛고 사는 사람들의 영성도 메마르게 한다. 우리의 마음의 벌판도 점점 황량해지고 잿빛으로 변화되어 가기 십상이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쳐나듯 이 사막의 땅에서 우리는 날마다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생생히 경험할 수 있었다. 내가 미전도 종족인 보로로종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자 했을 때 아내에게 쓰나미 같은 도전이 몰려왔나 보다. 작은 승용차에 가재도구들을 가득 싣고 나니 운전석 말고는 아이도 나도 앉을 자리가 없었다. 덜컹거리는 도로에서 아이 머리 위로 물건들이 떨어지고 내 마음에도 눈물이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이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아내가 마음속에 꾹 참았던 말을 내게 던졌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할까? 그냥 여기서 하던 대로 사역해도 되잖아.”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은 말 그대로 모험이었다. 한국 사람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외로움을 견뎌야만 한다. 거긴 우리 집이 없기에 매달 집값도 들어가야 하고 딸 아이를 보낼 학교가 없기에 카메룬으로 떠나 보내야만 한다. 아이 학비며 기숙사비며 또 방학 때 오가는 경비는 도저히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천문학적인 지출이었다. 무엇보다 아직은 어린 딸을 떠나 보내야만 한다는 것이 견디기 힘든 아픔이었다. 한 번은 아이의 학교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아이가 체육시간에 쓰러져 호흡이 어렵고 온몸이 마비되었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카메룬 북쪽 응가운데레(N’Gaundere)까지는 자동차로 가야만 한다. 그곳에서는 기차를 탈 수가 있다. 그러나 그곳에 도착해 알아보니 기차에 자리가 없어 사나흘은 기다려야만 한단다. 우리는 자동차로 가기로 했다. 그것은 모험 중 모험이다. 처음 가는 길이기도 했지만, 포장도 되지 않았고 도적들이 가끔 출몰하는 곳이라 현지인들조차도 꺼리는 길이니 기다렸다 기차를 타는 것이 낫겠다고 그곳에 계신 선교사님이 만류했다. 그래도 달려야만 하고 절대로 멈출 수 없는 길이었다. 그 길 위에서 승용차는 우리의 마음처럼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금방이라도 아무도 없는 곳에 퍼질 것만 같았다.

“하나님 아이를 살려주세요. 누군가를 데려가야만 하신다면 아이 대신 저를 데려가세요.”
그렇게 울면서 기도하며 삼 일을 달려서야 아이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었다. 가는 동안 얼마나 마음 졸이고 불안하던지. 삼십 년처럼 길고도 먼 여정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딸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순종을 보셨다. 하루도 굶지 않았고, 아이의 학비도 기숙사비도 모두 채워졌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라디오방송국이 세워졌고 전파가 닿는 곳마다 변화의 파도가 일고 있다. 광야에 길을 내시고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셔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책임져주시지 않았다면 한순간도 이곳에서 살아갈 수 없었다.

다른 곳에서는 당연한 것이 차드에서는 특별한 경우가 많다. 물, 전기, 도로가 그렇다. 다른 곳에서는 전혀 신경 쓸 필요도 없는 것들이 차드에선 우리의 에너지를 너무도 많이 빼앗아 간다. 사역을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 쏟고 또 생존을 위해서 죽을 힘을 다하는 것은 결코 쉬운 삶이 아니다.

차드, 우리 인생의 광야에서 소중한 교훈을 배웠다. 나는 종종 아이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특권으로 알고 감사하자. 엄마 아빠랑 떨어져 지내야 하지만 자립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람으로 일찍 세워짐을 감사하자. 차드의 삶이 불편하고 힘들지만 그것을 통해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넉넉함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하자. 남들이 알아주지 않고 관심 갖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알아주시니 감사하자.”

차드에선 2월부터 살짝 긴장하게 된다. 꿈같은 날씨가 지나고 사하라의 먼지가 더위와 함께 본격적인 심방을 오기 때문이다. 차드의 4월은 말 그대로 사월(死月)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렵지 않다.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를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 은혜의 빗줄기가 우리의 심령 위에 촉촉히 적시도록 성령의 단비가 이 땅 가득 내리도록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