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먹을 땐 쩝쩝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사하라의 별빛 아래서]

“먹을 땐 쩝쩝쩝 소리밖에 안 들려.”
아내가 급식시간에 나에게 자주 하는 말이다. 진짜 그렇다. 고요한 중에 들려오는 쩝쩝 소리는 묘한 기분을 만들어 낸다.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와 자식들 입에 밥 들어가는 소리가 제일 좋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특권이다. 얼마나 먹는 것을 좋아하는지. 영혼을 만지는 울림도 “몸을 돌보는 일부터 해야 한다.”는 얼마 전 읽었던 글귀가 생각난다. 먹는 것을 나누는 것은 단순히 우리의 허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행위임을 배운다. 음식은 단순히 생명을 유지하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즐겁게 하고 우리를 돌보시는 하늘 아버지의 은혜를 깨닫게 해준다(마 6:30).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작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면서 그들을 보듬어 준 일은 가장 멋진 사랑의 행동이었다. 아이들을 먹이고 입힐 수 있어 행복하다. 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가 복되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지도 알 것 같다.

EBS(성경고등신학교)안에 있는 데이케어 센터에서 매일 펼쳐지는 풍경이다. 데이케어센터가 자리한 EBS학생들은 3년 동안 의무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해야만 한다. 아빠, 엄마 모두 목회자로 사모로 훈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해마다 40여 가정이 목회자가 되기 위해 인근 각지에서 모여든다. 학교 기숙사가 이들 모두를 수용할 수 없어 대부분 학교 주변에 흩어져 생활하고 있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 아빠는 학교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먹거리를 조달하고 엄마는 물을 긷고 나무를 해서 음식을 만들어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공식적으로는 노회가 파송하여 졸업 때까지 이들을 돌보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대부분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년 동안 이곳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방치된 아이들이 늘 나의 눈에 밟혔다. 대부분의 아프리카가 그러하듯 자녀들은 셀 수 없이 많다. 자녀가 많다는 것은 하늘의 축복이다. 원시경제와 일차산업에 의존하는 이곳에서 많은 자녀는 가정경제의 든든한 기반이 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양육을 위한 책임보다는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받는 수단으로 여겨진다. 여기 신학교의 아이들은 취학 전 어린이들이 거의 반을 차지한다. 그런데 주변에는 이들을 돌봐 줄 그 흔한 유치원 하나가 없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냥 놓여지고 방치되었다. 하릴없이 배회하고, 심심해 말썽을 부리다 어른들께 혼나고, 엄마아빠가 공부하는 강의실을 기웃거리고 기다리다 지쳐 흙 바닥에 잠들어버린 아이들을 보는 것은 마음의 큰 부담이었다. 그래서 그들을 돕고 싶었다. 이들을 돕는 것은 목회자를 돕는 것이요, 앞으로 그들이 섬길 교회와 교인들을 섬기는 것이며, 이 땅에 건강한 꿈나무를 가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기도하며 데이케어를 열고 싶었다. 마침 ‘한국기아대책기구’를 통해 한 가정이 이 일에 귀중한 물질을 헌금해주셨다. 그래서 아이를 영육으로 먹여 부모를 세우는 복된 일이 시작될 수 있었고 ‘쩝쩝’ 소리를 들으며 흐뭇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감사할 뿐이다.

데이케어센터의 하루 풍경
데이케어센터에서는 재미있는 풍경이 매일 펼쳐진다.
다섯 살 먹은 아이가 네 살 먹은 아이를 위해 아내가 한 말을 어린이만의 언어로 열심히 통역해준다. 네 살배기 아이는 잘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뭐라 뭐라 쫑알거린다. 네 살배기의 말을 다섯 살배기가 다시 아내에게 통역을 해준다. 그런데 불어가 아니다. 현지어도 아니다. 구글 통역기도 해석할 수 없는 이상한 나라의 방언이라고 말해야겠다. 그러나 참 사랑스런 아이들이다.

학기 초에 집에 가겠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아이도, 우리가 다가가면 뒷걸음치며 ‘앙’ 하고 울음을 터트리던 아이도 이젠 반가운 웃음으로 먼저 다가온다. 주절주절 먼저 말을 걸어온다. 옆집에 마실 온 할머니처럼 듬성듬성 보이는 흰 이를 드러내며 깔깔거린다.

매일 새로운 급식 메뉴를 만드는 게 쉽지는 않다. 여남은 날 고민하다 소스를 즐겨먹는 이곳 식문화에 착안해 ‘바나나-우유’시럽을 만들어 빵을 찍어먹게 했다.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설거지 하는 곳까지 와서 소스를 담았던 그릇의 바닥까지 핥아먹는 아이들이 있다. 먹을 땐 자기들끼리 나름의 규칙이 있다. 소스를 두 번 찍거나, 볶음밥에 들어간 덩어리(참치나 고기)만 골라먹으면 엄청 눈총을 받는다. 치열한 밥상을 대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흥부네 식탁을 떠올려 본다.

수업이 다 끝나고 문밖에서 아이들을 하나씩 포옹하며 배웅한다. 한 아이가 그날 배운 찬양을 부르기 시작한다. 이내 합창이 되어 온 캠퍼스에 울려 퍼진다. 가기 싫다고, 더 있고 싶은데 너무 아쉽다고 기쁨의 시위를 하는 것 같다. 오늘도 고마웠다고 세레모니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10분이 넘도록 부르고 또 부른다. 이제 집에 가라고 해도 멈추질 않는다. 날은 더워져 힘은 더하지만 보람도 더해져 마음이 포근하다.

집에 온 아내가 점심을 먹으며 오늘 데이케어센터에 있었던 일들을 나눈다. 밥풀 세례를 받는 나도 아랑곳없이 대꾸하며 신명이 난다. 찬은 보잘것없지만 어느새 왕의 만찬이 부럽지 않은 성찬이 된다.

생소한 호기심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자
‘두둠서기’ ‘아래구비’ ‘아래마끼’ 차드 사람이 말하는 한국어를 듣고 있으면 웃음이 절로 난다. 차드 사람이 이곳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다. 어떤 아이는 너무 진지하다. 나는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진지하게 뭔가를 배우는 사람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뭔가 집중해서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 행복이다.

“나는 단지 그대에게 생소한 곳은 익숙하게 만들고, 익숙한 곳은 생소하게 만들도록 권하고 싶다.” 송나라 때 ‘선본’이란 스님이 가르침을 청하는 항주 절도사 여혜경에게 들려준 말이라고 한다. 낯선 한국말로 가르치는 태권도를 너무도 진지한 표정으로 배우는 아이를 보면서 타성에 젖어 주님을 대면하는 나를 발견한다. 우리 주님을 아이의 진지함으로 더 알고 싶다. 아이들의 어색한 한국어 구령에 맞춰 이것을 다짐해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호 6:3)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던 차드 아이들과 다시 만나 이런저런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cdp, 어린이개발사역). 부활절 방학을 맞아 이곳에 온 딸도 선생이 되어 불어를 잘 읽지 못하는 아이들을 가르쳤다. 어느덧 훌쩍 커서 엄마 아빠를 도와주는 아이가 대견하다. 가족이 함께해 행복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광야 같은 이 땅에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주님의 은혜였다. 그러나 보조동력은 분명 가족이었다. 지치고 힘들어 포기하고 싶을 때 꺼져가는 사명의 불씨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신 분은 성령의 날숨이었다. 또 가족의 위로의 들숨이 큰 위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곧 생소한 곳(대학, 성인)으로 나아갈 우리의 아이 빛터를 축복한다.